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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과 성과의 상관관계
개미로 탈피한 베짱이의 고군분투기
동년배 강사원 2026.07.22.  00:44

[제정신도 아니면서 어딜 가겠다고, 술맛 떨어지니까 해결하고 와]

[차이면 청승 허용]

주소 하나를 던져주고 홀랑 봉고차를 타고 떠나버린 친구들의 야속한 뒷모습을, 엄밀히 말하면 그들이 보낸 냉정한 카톡을 보며 현성은 울상을 지었다. 바야흐로 여행날인 수능 성적 발표일 D-1, 덧붙여 민현성의 고백일 D-1이었다.

수능 한파는 잦아든 지 오래, 고3이 할만한 수능 후 정신 나간 짓 체크리스트를 지워나가는 것도 질릴 때가 됐다. 슬슬 미래에 대해 걱정할 시기란 말이다. 진학에 뜻이 없던 그의 친구들은 부모님의 잔소리를 피하고자 여행을 떠나기로 뜻을 모았다. 성적표가 필요하냐? 받으러 가기 귀찮은데 학교 째고 여행 가자. 당연히 그 여행에 본인의 자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현성은 하루 전 난데없이 떨어진 축객령에 핸드폰을 붙잡고 연신 왜? 라는 말만 두드려댔다.

숫자는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답은 없다. 여린 마음에 스크래치가 죽 난다. 프로필을 눌러 전화를 걸어봐도 누구도 받지 않는다. 몇번을 걸어봐도 뚝,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안내음이 들리거나 숫자는 사라졌지만 답장이 오지 않을 때마다 가슴에 긴 상처가 죽죽 난다. 얘들아 나 상처받아. 현성은 화면을 보며 핸드폰을 연신 주물럭거렸다. 마지막으로 설움 가득한 카톡을 날리니 그마저도 무시당했다. 현성은 울적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다 핸드폰을 보면대 위에 엎어뒀다.

“하….”

 야속하긴 하지만 잘못한 것이 많아 항의도 할 수 없다. 어딜 가고 싶냐는 말엔 아무데나 가자 따위의 답이나 날렸고 여행 가서 먹을 음식을 사러 마트에 갈 땐 코빼기도 안비쳤다. 사실 마트에 간 것도 아주 나중에나 알았다. 정해진 여행지는 자주 가던 곳이라 숙소도 원래 가던 곳이 있으니 그곳에 가겠거니 했는데, 나중에 밀린 톡을 올려봤을 때 투표를 한 것을 뒤늦게 알았다. 태도가 그랬으니 친구들도 이걸 모를 리가 없다. 현성의 정신머리가 지금 콩밭에 가있다 못해 세를 들고 눌러살아 이름모를 농부의 추수까지 돕고 있다는 걸.

 전에 네 상황을 아니 봐주겠단 요지의 톡이 왔을 땐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19세 농부 민현성, 콩대를 끊던 걸 멈추고 허리를 펴보니 알겠다. 눈앞에 닥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정신머리를 콩밭에 내던져놨다는 것을. 하여 현성은 감정 그리고 현실과의 대면을 목전에 둔다. 

**

 시작은 2학년 1학기. 현성은 벚꽃이 만발한 교정에서 시답잖은 농담에 웃으며 어깨를 치받는 소꿉친구를 향한 연정을 자각했다. 민현성의 “검은머리짐승 페티시”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가, 그 발상지를 찾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여기서 알아보는 민현성의 이상형 : 검은 머리,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사람, 쌍꺼풀이 있지만 담백한 인상, 의지가 되는 사람, 어른스러운 사람. 더불어 턱께에 흉터 하나 그여있으면 스트라이크 존. 생각해보면 이때까지 몰랐던 게 더 이상하다. 현성은 그의 전 애인 리스트를 쭉 떠올리며 양손에 고개를 묻었다. 아, 내 페티시가 신명우였다니…

현성은 그 길로 속절없이 명우에게 빠졌다. 남들은 작달만한 화면으로나 보는 이상형이 현성은 4K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데 빠지지 않기도 어렵다. 그렇게 아스팔트에 붙어있는 껌딱지마냥 명우에게 붙어있기를 1개월….

 현성의 친구들은 해도 가망이 있는 짓을 하라고 말렸다. 마침 명우가 1학년 때 사귀었던 애인이 여자에, 그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범생이었단 말을 하던 차였다. 현성은 선배가 뚫어준 편의점 앞에서 맥주캔을 들이키며 그의 친구에게 하소연했다.

“근데 원래 관심 없으면 시간 안내잖아…. 명우도 날 좋아한다는 뜻이 아닐까?”

“넌 씨발 나한테 관심 있어서 시간 내주냐?”

결국 어찌어찌해서 명우와 썸-일방적인-을 타는 관계까진 이르렀는데 현성은 조금 더 나아가고 싶었다. 돌려 사귀면서 좋아요, 별점 다섯개 찍는 인스타 감성 카페 같은 연애 말고 조금 더 오래가는 장터 80년 맛집 같은 연애를 하고 싶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명우랑 오래 보고 싶으니까.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면 까이거나 헤어지고 나서도 괜찮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연인이 되지 못하면 적어도 친구로라도….

그래서 현성은 자신을 개선하기로 결심한다. 2학년 2학기, 민현성의 不良生活 淸算計劃(불량생활 청산계획)-조금 더 진지하게 보이고 싶어서 한자로 기재-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제법 성공적이었다. 2학년 1학기 때만 했어도 성적이 평균 40점 언저리였던 현성이 3학년 1학기에 이르러선 평균 80점을 달성했으니. 취미로 하고 있던 기타를 진로로 삼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현성은 원조 맛집 자격 증명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서…

“수능 평균 2등급만 넘기면 너한테 고백할래.”

“넘기는 거면 1등급인데?”

“아, 아니. 그러니까 2등급만 되면!”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뒤, 초록이 만발하는 교내 산책로에서 수시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명우를 붙잡고 말했다. 수시 합격한 대학에서 지정한 최저등급의 평균점이 3등급이었음을 감안했을 때, 현성은 대학에 합격하면 네게 고백하겠노라 말한 것이다.

“그래.”

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끄트머리가 살짝 올라간 명우의 입꼬리를 보며 현성은 뛸 듯이 기뻐했다. 생에 그런 일은 다시 없다는 듯.

현성은 그날 이후로 더 열심히 했다. 손이 굳지 않게 최소한의 기타 연습을 하는 걸 빼면 늘 명우와 함께 야자실에 있거나 홀로 도서관에 가 문제집과 인터넷 강의를 들여다봤다. 오며 가며 노래를 듣던 그가 영어 듣기 평가를 대신 듣기 시작했다. 밥을 먹고 나서도 핸드폰이 아닌 단어장을 보고 살았으니, 평생 베짱이처럼 살 것 같았던 현성이 봄을 맞아 개미로 탈피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선생들 사이에 오갔다.

그만큼 열심히 했다. 문제가 있다면 노력은 반드시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꿩 먹고 알 먹겠다는 이상과는 달리 현성이 수능을 대차게 조진 것이다. 무슨 답을 골랐는지 기억도 안 나서 가채점도 제대로 못 했다. 엉성하게 한 가채점의 점수가 처참해 무서워서 등급 컷도 못 봤다. 역대급 불수능이라는 소식은 아침저녁으로 뉴스에서 떠들어대서 알긴 했다. 그렇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등급 컷이 암만 낮아져봤자 내 등급이 올라가진 않는데….

[시험 어땠어] 오후 6:34

 오후 6:40 [시험? 그럭저럭 쳤지]

 [나 내일부터 학교 안 가고 학원 나가서 자주 못 봐 ㅠㅠ]

오후 6:41 [실기 준비..]

[현성아] 오후 7:10

[알았어] 오후 7:15

수능 날 이후로 명우한테 연락도 제대로 못 했다. 합격하고 나면 보지도 않을 원장에겐 수능 죽 쒀서 수시 망했으니 실기 연습해야 한다고 웃으면서 말했는데 명우의 연락은 아주 기를 쓰고 피했다. 최저를 맞췄다면 있지도 않을 실기 시험을 대비해야 한다는 핑계로 피해 다녔으니 명우도 어렴풋이 알 테다, 현성이 수능을 말아먹었다는걸. 그것도 고백이고 나발이고 학원에 처박혀서 하루 온종일 손이 헐도록 기타를 쳐야 할 정도로 말아먹었단 걸.

‘실망했겠지….‘

의자에 늘어져서 악보에 있는 모든 동그라미-음표 제외-를 광인처럼 중얼거리며 칠하고 있는 현성에게 강사가 왔다. 평소 같았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텐데 성적 발표 전날이라고 퍽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주 몸이 땅에 박혔네? 왜, 잘 안돼?”

“아뇨….”

“그럼 내일 성적 나와서?”

“네…….”

“너도 걱정이란걸 하는구나.”

 네에……. 현성의 말꼬리가 끝도 없이 늘어진다. 몸도 따라서 하염없이 늘어진다. 전임 강사는 안타깝다는 눈으로 현성을 바라보다 허리는 똑바로 세우라며 드럼 스틱으로 현성의 허리를 꾹 찔렀다. 보기보단 아프게 찔려 현성은 인상을 찡그리며 의자를 짚곤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렇다고 죽상으로 있으면 어째. 입시생이면서, 마인트컨트롤 몰라? 조금 있다가 어디까지 했나 본다. 삑사리나면 가만 안 둬.”

“선생님.”

“왜?”

“아니에요….”

싱겁다는 듯 드럼 스틱으로 보면대를 친 강사는 현성을 뒤로하고 다른 학생에게 걸어갔다. 현성은 다시 등을 한껏 의자에 기대곤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있나요... 사랑해본 적, 영화처럼 첫눈에 반해본 적... 고쳐질 기미가 없는 꼴값 말기였다.

그 뒤로 쭉 컨디션이 안 좋았다. 물을 마시고 초콜릿을 입에 달고 있어도 우울함이 통 가시질 않았다. 담타하자고 꼬시는 재수생이 청심환을 주는 약사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자긴 두 번째라 긴장도 안 된다며 재수생이 건네준 담뱃대를 냉큼 입에 물었다. 결국 한 입도 제대로 못 빨고 다시 나오긴 했지만. 불량학생 시절에도 입에 안 댔는데, 새삼 그게 진정제가 되어줄 리 만무했다.

“도대체 이걸 왜 피는거야.”

옷자락에 배어든 담배 냄새 때문에 기분까지 불쾌해져 현성은 그날 하루를 통으로 날렸다. 연습도 제대로 못 했고, 명우한테 하고 싶은 말도 정리 못했다. 여전히 긴장감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등허리가 뻐근하게 저렸다. 불안한 감정이 목께를 타고 넘어와 괜히 친한 원생을 들쑤셔 투닥거리기까지 했다. 학원 일과가 끝난 밤 10시, 마침내 기타를 등에 메자 보조 강사가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지 지랄도 오늘까지고 내일부턴 안 봐준다며 으름장을 놨다.

‘전임도 아무 말 안 하는데…. 보고 싶다 명우야….’

그리고 무슨 정신으로 전철을 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에 들어와 담배 냄새에 쩐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10분간 베개에 머리를 박고 한숨을 푹푹 쉬고 있으니 진동이 울렸다. 고개를 돌려 게슴츠레 뜬 눈으로 화면을 보자 카톡이 와있었다. 어지간히 꼴았는지 내용이 가관이었다.

[야 그냥 ㅈㅣㄹ러] 

[걔 이미 니 남친임] 오후 10:58

[세상에 어떤 친구가 ABC 순서도 모르는 골빈 새끼 공부를] 

[방학 내내 지 학원까지 그만두고 봐주냐] 오후 10:59

취했으면 쳐 자. 현성은 퉁명스러운 답장을 보내곤 핸드폰을 베개 아래에 쑤셔 넣었다. 진동이 계속 울렸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마찬가지로 시덥잖은 내용일테다. 읽어봤자 마음만 심란해지는…. 결국 신명우의 연락이 아닌 이상에야 현재 민현성에겐 아무 의미가 없었다. 친구 좋다는게 뭐냐, 따위의 말은 다 거짓말이다. 사랑 빼곤 소용없다. 그를 어화둥둥 아꼈던 선배며 시덥잖은 연애상담에 약 1년 반을 시달렸던 친구들이 들었다면 멱살을 잡았을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내일도 내일의 해가 뜬다. 현성은 잔뜩 굳은 몸뚱이를 끌어 이불 안에 집어넣고 눈을 감았다. 이러다 눈 떴으면 3월이면 좋겠다. 명우가 내 고백을 받아주고, 학교도 합격했고…. 미래를 상상하자 분수의 물줄기처럼 기대감이 솟고 동시에 파도처럼 불안감이 밀려왔다.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거센 박동에서 시작된 열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목께를 간지럽히는 긴장감을 내리누르고 현성은 잠을 청했다. 곧 수마가 모든 것을 덮었다. 

 

**

 

번쩍 눈을 뜨자 묘하게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창밖이 유난히 밝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좆됐다는 생각이 들어 현성은 빠르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12시 23분. 단단히 좆됐구나. 부재중 전화 12건. 카카오톡 54건. 부재중 전화는 담임선생이 반 전임 강사가 반. 카톡은 걱정하는 입시반 원생들과 술에 단단히 꼴은 친구…그리고 명우. 

[2시에 와.] 오전 09:26

늦었다는 생각이 저 멀리 날아갔다. 아니, 그냥 정신이 아득해졌다. 고작 네글자에 불과한 문장을 읽는 데 영겁의 시간이 걸렸다. 현성은 답장을 위해 침대 끝에 앉아 핸드폰을 두 손으로 쥐었다. 한참 화면을 바라보던 현성의 손이 더듬더듬 움직인다.

 

[근데 명우야 나 수능 엄청 못 친 것 같아 2등급은커녕 대학도 못 갈 것 같은데 어떡하지? 네가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그냥 다 소용없는 일이 된 것 같아….]

 

결국 현성은 한창 쳐 나가던 긴 문장을 보내지 못하고 전부 지웠다.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 탓이다. 면목이 없었다. 전부 다 핑계 같다. 명우가 그에게 할애해준 시간의 양만큼 수치심이 밀려왔다. 끝도 없었단 소리다. 현성은 우울한 얼굴로 2시에 오라는 네 글자를 엄지로 쓸었다. 그와 동시에 말풍선이 쑥 밀려 올라갔다.

[현성아 와 기다릴 테니까] 오전 12:30

[어차피 성적표 받아야 하잖아 학원 다니는 애들 다 와서 받아 갔어] 오전 12:30

현성은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느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명우가 기다린다고 했다. 그러면 현성은 명우에게 가 사과를 하던지, 내년이라도 기약해야 한다. 수능 날 이후로 입은 적 없는 교복을 꺼내 걸치고 흰 롱패딩을 둘러 입었다. 아침에 먹으려 사다 뒀던 삼각김밥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문을 열자 새하얀 눈발이 날렸다. 

‘창밖이 유난히 하얗다 싶었는데 눈이 왔구나….’

눈이 온 난간을 손으로 쓸어가며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자 뽀득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동시에 추운 바람이 불어 현성은 몸을 잔뜩 움츠렸다. 한기가 몸을 타고 흘렀다. 외로워서 더했다. 생각해보니 평소 같았으면 명우에게 칭얼거릴 사안-명우야... 나 시험 망했어...-이라 더 그런 것 같았다.

학교에 갈 때면 으레 탔던 버스에 타니 기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성을 바라봤다. 붙어오는 시선을 무시하고 빈 자리에 앉았다. 버스는 한산했다. 이 시간즘엔 학교를 가는 사람도, 직장에 가는 사람도 없으니 당연했다. 맨 뒤 구석진 곳에 앉아 학교에 성적표를 받으러 간다고 전임강사에게 연락을 보내니 농담조로 살아는 있냐는 답이 왔다. 저녁 타임까진 오라는 톡에 답장을 한 뒤 현성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창밖을 바라봤다. 차창 너머로 명우와 학교에 오갈 때 같이 걸었던 길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마치 주마등처럼 저기선 무얼 했고, 또 저기선 무얼 했고….

현성은 고개를 숙여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댔다. 차가운 온도가 머리를 식혔지만 개운해지진 않았다. 도착하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노래가사처럼 멋들어진 고백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바보같이 피해 다니다 내년에 노력하겠다고 말할 게 아니라.

학교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는 알림이 울려 현성은 차임벨을 눌렀다. 카드를 대고 내리자 익숙한 정문이 보였다. 현성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정문을 지났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운동장을 돌거나 근처 벤치에 앉아있는 학생들이 많았다. 왁자지껄 웃는 소리가 운동장에 그득하다.

 뭐가 그렇게 기쁘고 좋아? 속이 활활 타고 있으니 남에게까지 불씨가 튄다. 현성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못났다 민현성…. 자조가 뒤따른다. 중간에 그를 알아보는 후배들이 인사를 건넸지만 현성은 고개만 까닥이며 인사를 받아주곤 교무실이 있는 본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명우를 마주치길 않길 간절하게 기도하며.

막상 교무실에 도착하니 점심을 먹으러 갔는지 현성의 담임 자리가 비어있었다. 책상 위엔 성적표 배부 명단이 놓여있었다. 몇몇 학생을 제외하고 빼곡하게 서명이 되어있었다. 현성은 멀거니 낯익은 이름들을 살피다 의자 옆에 놓인 스툴을 끌어와 앉았다.

패딩을 입고 있으니 다른 선생들이 오며 가며 현성의 얼굴을 확인했다. 개중에 몇몇이 현성을 알아보며 -성적표 받으러 왔어? 늦게 왔네, 김쌤 곧 오실 거야.- 인사를 건넸다. 현성은 괜히 넉살이 좋은 척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고 선생들은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안 오셔도 괜찮은데. 오늘 반차내실 일은 없으시대요?‘

정말로, 이 자리에 앉아있는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결과를 마주하기 싫어서. 명우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지나가는 선생들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인사하던 현성의 어깨에 마침내 두꺼운 손이 얹혔다.

“늦었다? 정시에 딱 와야지. 학원에서 안 보내주든?”

현성의 담임이었다. 덜컹, 현성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담임은 아이고, 앓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걸터앉아 자리를 대강 정리하기 시작했다. 넌 내가 이번 교시에 수업 있었으면 어쩌려고 늦게 왔냐, 핀잔주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학교 안 오니까 살만하디?”

“어차피 학원 다니는데요. 똑같죠….”

“그래도 하고 싶은 거 하니까 좀 다르지 않아?”

담임이 출석표를 꺼내 현성의 이름 아래 동그라미를 쳤다. 현성은 손가락 끝을 조물거리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담임은 출석부를 책상에 얹어놓고 말을 이어 나갔다.

“너 인마, 네 친구가 너 왔는지 확인하고 갔어.”

“...누가요?”

“그... 3반에 있잖아. 1학기 때 반장이었나?”

“명우가요?”

“그래, 걔. 나는 뭔 일이 났나 했다. 근데 너는 늦기까지 하지 아주.”

 담임이 혀를 내두르며 현성에게 검은 펜 한 자루와 명단을 건넸다. 현성은 펜을 만지작거리며 새겨진 음각을 더듬었다. 왔으니 다행이라며 담임은 서랍에서 민현성, 이름 석 자가 적힌 봉투를 꺼냈다. 그냥 주면 되지 뭔 봉투에까지... 현성은 불안한 눈으로 흰 봉투를 바라봤다.

“체크하고 옆에 사인해. 아휴, 정현이랑은 연락 안 돼?”

“제 전화도 안 받던데요….”

‘아마 술 마시고 지금까지 자고 있을걸요….’

현성의 대답을 듣자 담임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현성은 건성으로 대꾸하고 새벽 내내 부어라 마셔라 했을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떨리는 손으로 펜을 움직였다. 영 내키질 않으니 속도는 굼벵이가 기어가는 듯했다. 빈 네모 칸에 브이자를 그리고, 서명란엔 이름을 음차한 영문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담아 썼다. 담임이 재촉하며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현성은 더 늑장을 부렸다. 마침내 펜이 종이에서 떨어지자 담임은 현성에게 봉투를 건넸다. 

“이름 쓰는 게 한세월이다, 한세월이야. 상소문 쓰냐, 사인 처음 해봐? ...채점은 해봤어?”

“대충은….”

“치자마자 실컷 놀았겠지, 어이구. 안 봐도 비디오다.”

담임이 현성에게서 펜과 명단을 건네받았다. 정자로 꾹꾹 눌러 쓴 서명을 보며 담임이 코웃음을 쳤다. 종이를 책상 한켠에 올려둔 담임이 다시 현성을 돌아봤다. 현성의 표정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담임이 의아하게 그를 바라봤다. 현성이 입꼬릴 어색하게 올렸다.

"어어? 진짜 뭔 일 났어? 표정이 왜이래."
"아뇨 좀 막막해서..."

현성을 바라보던 담임의 표정이 기묘해진다. 그러나 이내 이즈음 고3들이 흔히 겪는 진로 고민이겠거니 싶었는지 의자를 돌렸다. 예체능 입시는 인문고 담임이 건드는게 아니다. 애초에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성적 케어 뿐이었다. 담임은 머리를 긁작이다가 팔을 뻗어 현성의 등을 두어번 두드렸다.

“학원이나 가라, 성적 확인 꼭 하고. 초상 치른 얼굴 좀 하지 말고!”

“네…….”

현성은 앉아있던 스툴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교무실에서 나왔다. 등에 따라붙는 선생들의 목소리 -표정이 왜 저렇대요? 몰라요, 쟤는 이번에…-를 무시하며.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시 55분이었다. 현성은 성적표가 담긴 봉투를 꾹 쥐고 터덜터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속 장소를 주고받은 적은 없었지만, 어디 있을진 알았다. 종례 시간이 다르거나, 청소 당번이 걸렸을 때 으레 서로를 기다렸던 후문 근처 벤치에 있을 것이다. 본관 중앙 문을 나서자 여전히 눈이 나린다. 현성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다 후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시간이 멈췄으면, 2시가 오지 않았으면 소원했던 그의 마음과는 다르게, 현성은 다소 잰걸음으로 후문을 향했다. 현성이 결과를 마주하기 싫은 것과 명우가 현성을 기다리는 것은 아주 다른 계제의 일이기 때문이다. 주머니에 담긴 성적표가 천근 같았지만 현성은 몸을 잔뜩 움츠리곤 계속 걸었다. 도착하면 명우에게 사과하고, 내년을 기약하고, 성적을 확인하고, 1년하고도 6개월 동안 반복했던 일들을 다시 또 반복하겠지…. 

마지막엔 뛰다시피 해 도착한 후문 벤치엔 명우가 이어폰을 꽂고 앉아있었다. 현성이 뛰어오는 것을 보고 있었는지 고개가 현성을 향해있었다. 단정하게 입은 교복과 명우의 어깨 위에 쌓인 눈을 보곤 현성이 다급하게 다가갔다. 명우는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우의 앞에 서서 현성이 입고 있던 패딩을 벗으려 하니 명우가 손을 저으며 말렸다.

“괜찮아.”

“...왜 밖에서 보자고 했어, 추운데. 그냥 학교 안에서 보자고 하지.”

“너도 여기로 왔잖아.”

“그건 그렇지만….”

현성이 손으로 명우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털었다. 명우는 현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을 털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든 현성과 명우의 눈이 마주쳤다. 현성의 눈이 떨렸다. 생각해뒀던 말을 해야 하는데,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멀리서 수업 시작종이 친다. 현성에게 무언가 선고하듯.

“어때, 좀 정리는 됐어?”

이어서 명우의 말이 들린다. 현성은 지레 쫄아붙었다. 분명 같은 나인데, 어른 앞에 선 기분이 든다. 예컨대 그에겐 카드와 통장으로 증명되던 부모님 같은…. 현성이 괜히 콧잔등을 찡그리며 눈을 꾹 감았다.

“...잘 모르겠어.”

“실컷 도망 다니더니.”

현성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당사자에게 들으니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이내 현성은 곧 수긍의 과정을 거쳐 얼굴 위엔 진득한 체념이 떠오른다. 알고 있으리란 생각은 했는데…. 현성을 보던 명우가 픽 웃었다. 현성의 머릿속이 빤하게 보인 탓이다. 민현성은 아주 옛날부터 신명우에게 뭘 숨기질 못했으므로. 

“그… 사실 나….”

“성적 확인도 아직 안 했고….”

“가채점은 해봤는데….”

현성이 비루하게 떨리는 손으로 패딩 주머니 안의 종이봉투를 꺼냈다. 마치 연서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뛰는 사이 구겨졌는지 흰 종이봉투는 다루는 것에 비해 형편없는 모양새였다. 현성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민 현성, 이름 석 자가 적힌 봉투를 바라본다. 근 한달간 회피했던 결과가 그 안에 들어있었다.

현성의 마음이 착잡해진다. 긴장감이 새삼스레 몸 전체를 휘감았다. 현성이 명우의 눈치를 살폈다. 명우는 변함없는 표정과 태도로 현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새 추위에 새빨개진 손이 봉투 끝을 천천히 열기 시작한다. 얇은 종이가 곱게 접힌 채 들어있다. 현성은 종이를 꺼낸다. 그 짧은 시간 현성은 숱하게 들어본 신부터 생면부지의 신까지 죄 찾았다. 그러나 답이 올 리가 없다. 결국 직접 결과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 끝끝내 온 것이다.

“명우야, 그런데 내가….”

명우는 말해보란 듯이 팔짱을 꼈다. 현성은 그 짧은 몸짓에도 속절없이 흔들렸다. 눈발이 날려 종이를 적셨다. 현성은 거세게 친 기타줄처럼 떨리는 손으로 접힌 종이 한쪽을 펼친다. ...같이 순차적으로 등급을 부여함. 유의 사항. 본 성적 통지표는…. 

“내가….”

현성의 떨리는 손이 다른 한쪽을 폈다. 심장이 드럼처럼 둥둥 울린다. 거기에 단조인지 장조인지 분간도 안가는 베이스가 얹히고, 현성은 종이 끄트머리를 꾹 쥐었다. 축축하게 젖은 성적표는 구겨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끝에서부터 숫자가 보인다. 1…. 잠깐, 1?

“내가.”

질질 끌던 말이 뚝 끊김과 동시에 팔락, 천근 같았던 종이가 힘없이 펴진다. 현성이 고개를 성적표에 박았다. 국어 1. 영어 2. 한국사 2. 법과 정치 1. 뚝, 몸 안을 온통 흔들더대던 드럼소리가 멎는다. 과목 아래 적힌 등급이 비현실적으로 높았다. 현성은 자신의 성적표가 맞나 이름과 학교를 다시 확인했다.

“…내가?”

현성이 떨떠름한 얼굴로 성적표와 명우를 번갈아봤다. 명우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그러냐는 의문형이 아닌 그것 봐라 내가 뭐랬냐, 따위의 의미가 들어간 몸짓이었다. 현성은 멍한 눈으로 명우를 보다 다시 성적표를 봤다. 1221. 거꾸로 봐도 1221. 수험번호는 기억도 안나지만 이름이랑 학교는 정확히 자신의 것이 맞다. 같은 학교 같은 반에 동명이인이 있지 않는 이상엔 그렇다. 현성의 눈 뒤로 일주일동안 했던 삽질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다만 현성은 스치는 영상에 감상을 붙이는 대신 명우를 한껏 끌어안았다. 꽃잎이 눈발처럼 나리던 3월, 현성이 하고 싶었던 대로…. 추위에 얼어붙어 까슬한 천이 현성의 볼을 스친다. 몸을 밀착하자 스며나온 향이 겨울 특유의 공기와 섞여든다. 현성은 한껏 숨을 들이켰다. 코 끝이 찡해져 고개를 명우의 어깨위로 묻었다. 잠시 현성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명우가 그를 마주안았다. 

손 안에 쥔 것을 움키듯 현성이 재차 명우를 한껏 끌어안았다. 친구라는 이름 아래 나란히 설 수 밖에 없던 것들이 맞물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결국 명우의 품 안에 안긴 꼴이 된 현성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 너 좋아해….”

“정말 좋아해….”

다른 무엇보다도 감정이 앞선다. 멋들어진 고백같은건 생각하고, 내뱉을 겨를이 없었다. 2년동안이나 묵혀두었으나 다듬지는 못했던 날것의 감정을 정제시키기에 현성은 급했다. 연신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는 현성을 명우는 그저 묵묵히 끌어안고 있었다. 패딩에 둘러쌓인 현성의 귓바퀴까지 벌게질 무렵, 그제서야 명우는 현성의 어깨를 살짝 밀치며 현성을 마주봤다. 상기된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했다. 

명우는 현성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마치 어느 봄날, 교정에서처럼. 현성은 이때까지 해온 상상과는 달랐으나, 아주 처음에 바랐던 것처럼 명우에게 속삭였다. 확신과 감정을 담아. 추수한 이삭을 한데 모아놓은 것처럼 쌓인 눈밭에, 속삭임은 나직하게 묻힌다.